![]()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던 때부터 설레던 참에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전주의 햇빛에 '당해버렸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친구랑 나는 여름이 막 시작되려고 하는 그 후끈하고 파릇파릇한 날씨에 도저히 저항하지 못한 채 연체동물이라도 된 마냥 괜히 히죽히죽대거나 아무데서나 조는 등 요양을 하다시피 지내고 왔다. 영화제에서 제공하는 한옥에서 숙박을 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저 단풍나무 밑에서 수다를 떨고 밤에는 마루에 앉아 나무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잘 때는 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옥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꼭꼭 챙겨먹었는데 음식이 참 정갈하고 맛있어서 평소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하는 나도 후딱 한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아무런 근심이 없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고 그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전주 바깥은 달력대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전주에서는 시간이 한 발짝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일행이 먼저 가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심심하기도 했고, '불면의 밤' 영화를 다 봐서인지 잠도 못 자고 몸도 축 났었는데 이번에는 심야영화도 안 보고 먹을 것도 잘 먹고, 영화도 무리하지 않게 봤다. - 바흐 이전의 침묵 바흐 음악이 나오기 전과 후의 유럽이 달랐다는 책자의 설명을 보고, 또 '바흐'에 관한 영화라니 보고 싶어서 봤는데 바흐를 재료로 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티브이 교양프로그램 같은 영화였다. 일화 같은 건 빼고 (일화에 집중되기 보다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진부함이 밀려왔기에) 바흐 음악만 깔고 여러 가지 풍경을 보여주는 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라리 명상하는 영화로서. - 아웃사이더 벨라 타르의 영화. 이번에는 주로 벨라 타르의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벨라 타르의 영화들을 예매한 것이 잘 한 짓인가 싶었다. 영화가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다. ![]() [4개월 3주, 그리고 2일]같은 리얼리즘 영화. 현실을 그대로 담은 것인데 그것을 화면으로 보면 얼마나 우울한지 알았다. 가정이 여성에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보여주는 페미니즘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 속의 남성은 행복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들을 짓누르는 그것(그것이 가정이든, 사회주의이든, 가난이든)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것 같은 삶. 그것이 보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집요하게 클로즈업 하며 무슨 감정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처음과 끝부분에 남편이 집을 나가버리고 부인이 울면서 남편을 잡는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생활고에 찌든 부부에게 뭔가 원인이 생겨서 남자가 나가나보다, 하고 일면적으로 보게 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왜 그 지경에 이르는지 납득이 간다. 마지막에는 부부가 세탁기를 하나 사서 트럭에 싣고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거의 한 때인지 남자가 돌아와서 다시 둘이서 노력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과거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든, 앞으로도 그렇게 산다고 하든,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이기 때문에 과거인지 미래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 가을 역시 벨라 타르의 영화. 앞의 두 초기작들에 비해 좀더 추상화된 면이 있다. 씨줄 날줄을 엮듯이 누가 누구를 기만하는지를 그 과정을 길게 보여주는데 (그러니까 글로 쓰면 얘는 쟤를 배신하고 쟤는 걔를 이용하였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끝날), 나는 그 움직임을 보진 못하고 끝에 가서 누가 추방됐는지만 알아챘다. 역시 클로즈업과 함께, 똑같은 얼굴이 그렇게 달라보일 수가 없었다. - 영화보다 낯선 단편 1: 미국 아방가르드 특집 보고 나서 친구와 쌍욕을 했던 영화.ㅋ 미국의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들이 보여지며 바람 소리가 들린다. 엠마 골드만, '자유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유를 직접 찾아라'라는 식으로. 그런 장면들을 보며 명상하는 영화인가보다,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 가서 거리의 시위대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음악에 맞춰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서 보여주는 장면에 이르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건 그저 미국도 시위하거든? 외에 무슨 의미가 있나. 무슨 시위인지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일곱번 째 희생자 1943년 미국 흑백 영화. 재미가 없었고 전혀 공포스럽지 않던 공포영화였음. 미국 흑백영화라면 차라리 그레이스 켈리나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오는 다른 영화를 보여주지! - 실록 연합적군 '1972년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눈 덮인 산장에서 경찰과 10여일간 대치하며 농성을 벌이다 체포된다.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상징적 단체이던 연합적군으로 이 사건 이후 일본 학생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 10여일 간 일어나는 일들이 거의 호러영화 수준이다. 간부급 되는 애가 산장에 들어오는 '신입'들에게 '자기비판하라, 총괄하라'라고 명령 혹은 묻는다. 공산주의를 스스로 어떻게 소화했는지, 스스로 공산주의화에 걸림돌이 되는 행동은 안 했는지 윽박지른다. 질문이 어이없고 (누가, 누구를 검열한다는 말인가?) (대의명분에 적합한 행동, 적합하지 않은 행동은 누가 정하며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누구는 이미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 아닌가?) 추상적이 그지없음에도 물어봄을 당한 사람은 겁에 질려 얼버무리며 아무 얘기나 털어놓는다. 그냥 자기가 찔렸던 것들. 이 간부인 애들은 '솎아내려고' 물어보는 건데 돌아오는 의외의 대답들에 또 그것을 꼬투리잡고 검열하고, 때린다. 그런 분위기에 맞춰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너 A맞지?' 라고 물어보는데 거기에 B면 어쩔 건데?, 그건 왜 물어?, 니나 잘해, 라고 말할 엄두가 안 나는, 자기를 계속 검열하는 공포. 나는 '자기비판'이라는 말이 이렇게 섬뜩하게 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제일 무서웠던 것은 여자애한테 니 잘못을 깨우쳤으면 니가 니 얼굴을 때리라는 장면. 여자가 자기 얼굴을 때리는 소리가 나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은 괴물처럼 짓뭉겨져있다. 그러니 호러영화라고 할 수 밖에... 특히 이 영화는 경험을 상기하는 영화였다. 명분 하에 엄숙해야 '했던' 분위기, 잘 알고 있는 인간 유형들... 영화 마지막에 모두가 해체된 후 한 소년이 '우리는 용기가 없었어'라고 외친다. 공포정치에 스스로 가담하고 있는 걸 직관으로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했다. 신념이나 열정이라고 착각했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했든... 아마 감독도 거기에 가담했고 후에 깨닫고 찍은 영화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나중에만 깨닫는다면 그런 비극이 없을 것이다. 나중이 되서야만 자기를 찾는다면 그런 비극이 없을 것이다.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무협 활극 영화/애니메이션은 늘 구미를 당긴다. 주인공 무명씨와 소년의 관계가 만화 '도로로'와 비슷했다. - 소설 소설가들이 시정(詩情)에 대해 토론을 하고 아마도 그 시정이 정점에 달했을 때 만났을, 한 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후일담이 살짝 끼인 영화. 감독이 촬영감독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냥 내용이 이해가 가게만 찍은, 촬영의 기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GV시간에 영화보다는 '문학'과 '중국어'에 대해 한 말씀 늘어놓겠다는 '교수님'들이 들이닥쳐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여운을 팍 망쳐버렸다. 더 망쳐버리기 전에 허겁지겁 극장 밖을 나왔다. - 사랑 한 프랑스 감독이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사랑했는지를 자랑하고 싶어 찍은, '니 잘났어요' 다큐멘터리. 자기 아버지 인터뷰 하는 게 전부다. - 사탄 탱고 벨라 타르 후기작. 7시간 짜리 흑백영화. 중간에 두 번 쉬는 시간 있었다. 전작들에 비해 더더욱 추상적이고, 감독이 화면 미학에 관심이 옮겨간 것 같았다. 지루한 유럽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이 영화가 시간이 길다는 것 말고는 다른 지루한 영화와 차별성을 못 느꼈다. 초기작들은 현실성이란 것이 너무 강해서 보는 동안 괴로움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재미는 없었지만 오히려 거리두기가 됐기 때문에 그런 압박이 없었다. 비, 진흙, 소, 밤. 지옥이 바로 저런 곳이 아닐까 했던 곳. -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 최근작? 마지막 날 긴장이 풀려서 봐서인지 흑백의 화면 자체가 집중이 되지 않아 졸면서 봤다. 다만 간간이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 감독은 음악도 점점 세련되게 만들고 화면을 신경 써서 찍는 만큼 어떤 미학을 완성하기 위해 음악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사탄탱고 끝난 후 운좋게 생긴 GV시간에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인 것만이 아니라 음악이고, 그림이고...'라고도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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